밥벌이의 지겨움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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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현의 노래', '자전거 여행' 다음으로 김훈의 세설(世設) '밥벌이의 지겨움'을 집어봤다. 한 작가의 글을 이렇게 계속 찾아 읽는 게 얼마만인가? 몇 년 전 인간을 끝으로 접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후 처음인거 같다. 김훈, 소개글을 보거나 하면 항상 이런말이 붙는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 준 작가!'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사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다시 읽어보면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려나? 자전거 여행이야 소재 자체가 그랬으니 그렇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의 다른 책을 읽고서는 그리 감흥이 오지 않았다. 계속 읽다 보면 뭔가 보일까 싶어 이번에도 그의 책을 잡았다.
이 책의 장르가 참 독특하다. 이런 장르는 처음 들어본다. 세설(世設), '칼의 노래'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세상살이를 한 장수의 입장에서 보여 줬고, '현의 노래'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 당시의 세상살이를 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여줬다. 이번에는 작가 자신이 현제 세상살이의 풍경을 노래한다. 노래, 예전부터 신경 쓰였다. 왜 하필 역사 소설(?)의 제목에 노래라는 단어가 들어간 걸까? 현과 노래는 그렇다 쳐도 칼의 노래, 칼과 노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칼의 노래를 읽으며 궁금했었다.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이순신, 우륵 그리고 김훈 자신의 삶의 고단함을 노래로 보여주는구나.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책은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젊은 시절 가난함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의 시각에서 우리 시대의 밥벌이는 지겹기만 하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떄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뺴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 밥벌이의 지겨움 中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 '밥'에 대한 단상 中밥은 누구나 먹어야 한다. 시위군중이나 전경, 기자나 나도. 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먹어줄 수는 없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나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숙취가 가시지 않는 몸을 이끌고 오늘도 학교를 간다. 잠이 취해, 커피에 취해, 뺵뺵한 전공서적에 눌려서도 도서실로 향한다. 저쪽 물가에 낚시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 올리는게 누군가? 바로 나다. 아이러니컬 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나 자신을 소외 시키고 있는 건가? 그러면 정녕 내가 하고 있는 건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인가.
이 책을 읽는데 왜 그리 예전에 부모님께 했던 말이 떠오르던지......
"어떤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자라온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돈에 대해 욕심은 별로 없어요. 나중에 의사가 되고 무슨 과를 가던 어느 정도의 수입은 보장 되고 그런데 요즘 인기 있는 과를 가서 몇 백만 원, 많게는 몇 천만 원 더 번다고 해서 행복할거 같지 않아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걸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나도 참 많이 어리석다. 돈, 그럼 대체 나는 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나는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의 위력과 구매력을 시시콜콜히 이해한다. 백만 원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물건을 살 수 있고, 어느 정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나는 훤히 알고 있다. 돈의 액수가 작아질수록 나의 이해는 점점 깊어진다. 이천 원이 있으면 버스를 타고 팔백 원을 거슬러 받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천만 원이 넘으면, 돈에 대한 나의 이해와 감각은 단절된다. 천만 원이라는 돈은 이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위력과 그 재력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때부터 돈의 액수는 난해한 동그라미들로 표시되는 추상적 기호에 불과하다. 나는 천만 원이 넘는 세상을 만질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불쌍하다 나여, 이래 가지고 어찌 세상을 향햐여 글을 쓴답시고 줄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가. - '돈'은 기호인가 실물인가 중내가 진정 이해하고 있는 돈은 어느 범위의 돈인가? 백만 원? 십만 원? 그러면서 난 천만 원, 억 단위의 세상을 이야기 하고 있었던 걸까? 돈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데 세상은 참 요상하다. 이런 나에게 삼천만 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준다.(몇 일 전에 고민 끝에 결국 나도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걸 만들었다.) 단지 나의 학력 때문에 나에게는 아직 난해한 동그라미들로 표시되는 추상적 기호에 불과한 돈을 빌려준다.
친절한 표정으로 통장을 만들어 주는 은행원의 얼굴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돈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가? 어쩌면 꼬맹이에게 권총을 쥐어준 꼴이 아닌가 모르겠다. 지금도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 지는 거 같은데 삼천만원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권총을 들었을 때의 난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가 보면 비웃을지 모르지만)요즘 들어 만 원 이하의 돈을 돈으로 보지 않는 나 자신을 볼 떄 마다 두려워진다. 버스비가 아까워 한 시간 거리를 걸어가고, 오백 원이 아까워 맛없는 메뉴를 고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만 원 이하의 돈에는 무감각 해진다. 밥 한 끼에 오천 원 넘어가는 메뉴도 서슴없이 고르고, 오천 원을 잃어버려도 그러려니 한다. 배송비가 붙는 걸 고려해서 비교해서 주문하던 인터넷 쇼핑도 요즘엔 배송비가 붙던 말건 그냥 사버린다. 돈을 우습 게 보고 있는 건가 보다.
난 돈을 사랑하진 않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돈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더 우습게 보인다. 돈은 준엄하다. 삶을 포기한 자가 아니면 어떻게 돈 무서운 줄 모르나. - 남재일과의 인터뷰 中삼천만 원이라는 기호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어느 정도 쓸 계획은 잡고 있고 '설마 저 돈을 어떻게 다 쓰겠어'라고 나름대로 다짐하지만 문득 두렵다. 어쩌면 이러는 중에 진정으로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게 되는 걸까? 돈, 여전히 알 수 없다. 돈은 기호인가 실물인가?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유달리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단락의 글을 읽으면 작가의 즐거움이 전해진다. 자신의 발을 직접 굴리며 지겨운 밥벌이에서 벗어나 팔도 강산을 돌아다니며 쓴 글이라 그런지 다른 단락의 글과는 달리 즐거움이 느껴진다. 물론 그 속에서도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폭양 속에서 소금을 걷어올리는 염부, 모두 다 떠난 고향을 지키는 할머니, 탄광 속에서 젊을을 바쳤지만 남은 건 진폐증과 카지노로 변한 고향의 풍경이지만 여전히 고향을 지키는 아저씨의 삶은 고단하다. 그래도 오늘도 다시 일어난다. 인간은 수몰되지 않는다!
스무 살의 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알게 되서 즐거웠고, 스물넷의 지금의 난 김훈을 알게 되서 기쁘다. 아직도 그의 글은 나에게 난해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에서는 없었던 다른게 보인다.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단편을 통해서 그 작가의 소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읽긴 했지만 사실 진정 이해하지는 못했다. '늙은 기자의 노래'를 듣다 보니 문득 다른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장에 꽂혀 있는 칼의 노래를 꺼내 봐야겠다.
이글루스 가든 - 일주일. 한 권의 책과 사랑하기.